20 나의 독후기9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를 읽고
엄마의 죽음을 지켜보며 저자의 엄마에 대한 사랑과 연민, 애절한 감정을 쏟아 담아내었다.
섬세한 감성적 디테일이 독자에게 오롯이 전달되어 글 읽는 내내 잔잔한 감동을 준다.
산문의 진가를 느낀 책이다.

죽음에 길에 들어선 부모를 두었거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큰 공감을 얻게 될 책이다.
한 발 더 나아가 부모의 간병과 요양문제, 연명치료, 존엄사에 대한 화두를 독자에게 안기는 의미 있는 책이기도 하다.

효심 깊은 저자도 사람인지라 의무성 효도에 대해 갈등을 드러낸다.
여섯 자식 중에서 엄마 병문안을 가장 자주하고, 엄마의 상태가 나빠질 때마다 요양원의 호출 받는 등 엄마 병구완에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가끔은 오랜 병구완에 지친 저자의 속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아무리 부모자식 사이라도 옛이야기 책에나 나올법한 효자가 아니라면 내 모든 것을 희생하며 내어 주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기간이 길면 길수록 더할 것이고 부모에 대한 의무성 효심마저도 닳아 점점 줄어들겠지.

이 세상 부모들이 자식에게 모든 것을 주고 희생하지만 자식들은 부모에게 왜 그리 하지 못할까.
사랑은 "내리사랑” 이랬다.
인류 탄생이후 오늘까지 그런 '내리사랑'의 DNA 때문에 인류가 멸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에게 내재된 그 위대한 사랑이 인류가 번성한 가장 큰 이유겠지.

저자 어머니의 죽음의 기록을 읽고 보니 인간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저리도 최악의 상태로 몰고 가서야 숨을 거두어 가나 싶어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잘 태어나,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일인가?

저자는 엄마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보며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제일 먼저 작성했단다.
나도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하고 아내에게 누누이 당부해 두었다.
하지만 생전에 공인된 국가기관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써 두지 않으면 병원에서 거부당한다는 걸 알고는 나도 써 두기로 했다.
“사전연명치료거부선언”은 존엄사는 물론 나의 죽음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크게 들었다.

책을 읽으며 공감한 부분이 많았지만 특히 시어머니의 죽음에 공감을 넘어 충격을 받았다.
직계가족 외는 아무에게도 부음을 내지 말라.
장례는 3일장이 아닌 죽음 후 즉시 치루라는 시어머니의 유언을 한 치도 어기지 않고 실행한 가족들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듣도 보도 못한 이런 식의 장례에 솔깃하여 깊이 생각해 보았다.
훗날 내 죽음도 그런 초간소화 절차대로 처리될 수 있기를 바란다.

많은 사람들이 100세 인생이라 자랑삼아 말하지만 결코 축복만은 아니다.
너무 건강해서 너무 오래 살아 마지막 죽음으로 가는 길은 상대적으로 본인 물론 가족까지 너무 긴 고통을 당해야 하는 그 삶이 과연 좋기만 한 건지 되물어본다.

책을 덮으며 내 어머니를 생각한다.
자혜로운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돌지만 끝내는 불효의 죄책감에 심란해 하고 만다. 
그리고 나는 왜 어머니 살아생전에 어머니의 삶에 대해 자세히 묻지 못했던가.
저자가 담담하고 세세하게 써 내려간 그녀 엄마의 삶을 읽으며 더욱 후회막심 했다.

엄마의 죽음에 대해 이토록 상세하고 섬세한 감성으로 쓴 애도일기가 또 있을까.
내 부모의 죽음을 되새기고 나의 죽음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끝으로 책 속에 나오는 병든 부모를 둔 자식들이 하소연 삼아 내뱉는다는 말이 가슴에 콕 박힌다.
“나이 들고 아픈 부모는 제일 답 없는 애증의 존재야”  (끝)

+ 덧붙임 +

<내 어머니의 죽음을 돌아보며>

이 책을 읽고 내 어머니의 죽음도 짧으나마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어머님은 30년 전, 내 나이 서른일곱 살 되던 해 하늘이 청명하다 못해 눈부시던 기억이 생생한 늦가을 오전에 돌아가셨다.
그날 그 쾌청한 하늘이 왜 그리 야속하던지.

어머니는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간암 진단 시 이미 수술이 불가능할 정도로 진행된 말기 상태라 4~6개월 시한부 삶을 통보 받았다.
두 곳의 큰 병원 진단 결과가 거의 같았다.
무의미한 수술을 하지 않기로 했고 어머니께는 알리지 않았다.

작은 형님이 모시고 살았는데 자식들이 애타는 심정으로 지켜봤지만 어머님은 우리가 감지할 만큼 특별한 증세를 보이지 않으셨다.
어머님이 진단 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는 걸 지켜보며 자식들의 마음도 편안해져 갔다.

나는 창원에서 진해 본가까지 버스를 타고 병문안을 다녔다.
어머니의 시한부 삶, 6개월이 지나도록 자식들의 걱정과는 달리 가슴 쓸어내릴만한 놀랄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을 조금 넘긴 늦가을 날에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초등 3학년이었던 딸과 둘이 어머님을 뵈러갔다.
어머님의 건강상태는 겉으로 보기에 여전하셨고 평소와 다름없이 겸상으로 점심을 먹었다.
식사 후 조금 쉬다 돌아왔는데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내가 달려 나와 어머니께서 많이 아파하신다고 전화가 왔단다.

놀라고 다급한 마음에 택시를 타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집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단말마의 비병이 들렸다.
간암 환자는 돌아가시기 이삼일 전에 엄청난 고통이 온다고 들어 알고 있었지만 어머니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내 짐작을 훨씬 뛰어넘었다.

끙끙 앓던 정도의 상태가 내가 도착하기 직전부터 저렇게 고통스러워하신단다.
목청이 찢어져라 토해내는 비명, 앉지도 서지도 눕지도 못하고 데굴데굴 구르듯 어쩔 줄을 모른다.
지켜보는 가족들도 안절부절 못하고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황급히 택시를 잡아 정기 진료를 받던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응급실에 도착하자마 의사는 마지막 순간이라고 직감했는지 강한 마취효과가 있는 마약성 주사를 놓으셨다.
약효가 퍼지자 어머님의 고통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달려온 가까이 사는 자식들은 놀란 심정으로 어머님을 뵈었다.
누나, 여동생은 울고불고 난리였고 형님은 돌아서서 눈물을 삼켰다.     

마취약효에 서서히 어머님이 신음이 잦아들자 자식들도 차츰 안정되어갔다.
모두 어머님 죽음이 임박했다는 걸 알았지만 아무도 말이 없었다.

약효가 떨어질 때면 계속 놓은 마취주사 영향으로 어머님은 짧고 약한 신음을 내셨지만 비교적 편안히 잠드셨다.
그런 모습 지켜보며 자식들도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날밤을 세웠다.

날이 밝아올 무렵 어머님이 깨셨다.
내가 손을 잡아 드리니 “야~야, 어서 출근해야지.”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났다.
내 어머님은 임종의 순간에도 내 걱정을 하시는 그런 어머니셨다.

초임 발령 받은 섬 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선생이 된 자랑스러운 아들이 무척 좋아하던 장어국을 끓여 오셨다.
나 혼자 몇날 며칠을 먹어야할 양을 큼직한 통에 가득 담아 가져오셨다.
그 무거운 국통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진해 시내버스-마산행 시외버스-통영행 시외버스-거제행 시외버스-도선을 타고 섬에 들어와 재를 넘어 학교 사택까지 배달하신 것이다.
그것도 장어국이 가장 맛있을 때인 초여름 무더위에 땀 뻘뻘 흘려가며.
그런 어머님께 나는 변변한 효도 한번 한 기억이 없다.

안타깝고 죄스런 마음으로 어머니 곁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바깥바람 쐬러 나가 벤치에 널브러지듯 앉아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형님이 어머님 상태가 심상찮다고 불렀다.
의사는 임종이 가까웠다고 했다.

당시에는 집밖에서 객사가 되는 걸 터부시했기에 집으로 모셔가기로 했다.
앰뷸런스를 타고 오는 도중 어머님은 점점 의식을 잃어가셨다.
집에 도착하여 안방에 모셔놓자 의사가 청진기로 어머님 심장이 완전히 멎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형님은 가족 친지들에게 부음 전화 하느라 바쁘시고 나 혼자만 어머님 곁을 지켰다.
어머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편안하고 평소 온화한 모습 그대로였다.

얼굴을 쓰다듬고 손도 만져 보았다.
온기가 남아있었다.
나를 나아주셨고 헌신적으로 키워주셨고 아낌없이 성원해주셨던 그 어머님은 숨을 거두고 영원히 잠드셨다.
朴鳳金, 향년 71세.

애끓는 슬픔이 물밀 듯 밀려왔다.
이제 더 이상 어머님을 볼 수도 없고 언제나 “야~야”라고 부르던 다정한 목소리도 들을 수도 없음에 눈물이 났다.
울음을 삼키며 꺽꺽 울었다.

당시에는 장례를 집에서 치렀다.
생전에 어머님이 기거하시던 안방에 마련된 빈소를 내내 지켰고 영정만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러다 빈소 앞에서 짧은 새우잠을 잤고 물 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첫날 하루 종일 먹지 않으니 누님들은 화를 내며 먹어야 한다고 성화였지만 먹지 않았다.
그냥 먹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배고픔도 참을 만 했다.
그러나 이틀 째 저녁에 너무 허기져 밥을 먹고 말았다.
못난 죄인이란 죄책감도 애끓는 슬픔도 배고픔 앞에서는 한낱 물거품에 불과했다.

삼일 째 출상하던 날 발인제부터 하관 때까지 나는 누나와 여동생들 보다 더 서럽게 울었다.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왜 그렇게 울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마도 불효에 대한 후회와 부끄러움의 눈물이었으리라.

어머님은 장례 후 평소 다니던 절에서 49재를 지내고 법당에 위패를 모셨다.

지금도 어머님을 생각할 때마다 살아생전 못다 한 불효의 회한이 가슴에 멍울져 아파온다.
‘어무이~'  (끝)

"감사합니다"  백산 절~ OTL  
by 백산 | 2020/04/02 18:50 | 교육단상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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