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나의 독후기28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는 1,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유대인인 저자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수용소에서 겪었던 비극적 체험을 담은 <해바라기>라는 제목의 에세이다.

저자 ‘시몬 비젠탈’이 악명 높은 수용소에서 혹독한 강제노동과 굶주림에 고통 받는다.
그리고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심지어 자신들 기분에 따라 학살을 일삼는 아비규환과 다를 바 없는 참혹한 수용소에서 공포의 나날을 보낸다.
오죽했으면
“일터로 오가며 보는 군인묘지에 핀 해바라기를 넋을 잃은 채 바라보며 그 무덤의 주인인 죽은 군인이 부러웠다”고 했겠는가.

어느 날 노역장에서 간호원에게 불려가 죽음을 앞둔 독일군 젊은 SS대원과 마주한다.
부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그 젊은 병사가 참회하며 유대인에게 용서 받고 싶다고 간청을 한다.

“제가 애초부터 타고난 살인자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마음 편히 죽고 싶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자는 하느님을 믿는 기독교 신자가 죄의식 없이 살인을 일삼다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서야 참회하고 자신의 만행을 변명하는 뻔뻔함에 분노한다.

한편으로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보며 인간적인 측은지심이 발동하는 등 만감이 교차하며 고심한다.
그러다 간절히 용서를 구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말없이 돌아선다.
그토록 용서를 갈구하던 독일병사는 며칠 뒤 숨을 거둔다.

전쟁이 끝 난 뒤에도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악몽에 시달리는 등의 고통을 받는다.

그러다 저자는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던 젊은 독일 병사의 집을 찾아간다.
폐허 속의 집에서 그의 늙은 어머니를 만난다.
그녀는 사진 속 아들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매우 착한 아이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녀는 전쟁이 끝난 뒤에 알려진 유대인 수용소에서의 잔혹한 참상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 아들은 절대 그런 학살의 만행을 저지르지 않았을 거다”며 확신에 차 말한다.
저자는 고심했지만 끝내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돌아선다.
'당신 아들은 살인마였소!'

자신이 원하던 답을 찾지 못한 그는 <해바라기> 마지막에 이렇게 묻는다.
『내 인생에서 벌어진 이 비극적인 이야기를 읽은 독자들도 나와 입장을 바꾸어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이 책의 2부 <심포지엄>에는 용서에 대한 그의 물음에 세계 각국, 각계각층의 유명 인사 53명이 보낸 답장을 실었다.
한 사건, 한 인간의 선택을 두고 53명의 저명인사들이 쓴 용서에 대한 갖가지 깊이 있는 의견을 진중하게 흠뻑 빠져 읽었다.
용서에 대한 나의 개념을 확고하게 정립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53명의 용서에 대한 의견을 살펴보면 다양한 주장을 펼쳤지만 비슷한 생각을 가진 분들도 적지 않았다.
종교적으로는 기독교도는 대체로 심판은 하느님만이 할 수 있으니 인간은 용서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불교도들도 마찬가지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유대교도들은 준엄한 심판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나도 용서에 관한한 기독교나 불교보다 유대교리를 더 지지한다.

책을 덮으며 용서에 대해 생각해본다.
먼저, 읽는 내내 몇 가지 원초적인 질문은 끊임없이 내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정녕, 인간이 그렇게 잔혹할 수가 있단 말인가?
평화 시절에 온정이 넘치던 사람들이 전쟁의 광기로 잔인한 살인마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나 극한상황에서는 본능적으로 살기위해 그럴 수 있을까?

왜 인간들은 대부분 죽음을 앞두고서야 참회하는가?
자신의 영혼의 평안을 얻기 위한 이기적인 행위가 아닐까?

기독교도인 그 젊은 SS대원도 죽은 뒤 하느님의 처벌을 두려워해서 용서를 빈 것은 아닐까?
용서를 영혼의 안식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용서는 언제나 아름다우며 善인가?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실수에 대한 용서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잔혹한 범죄는 용서하면 안 된다.
그런 잔혹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용서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우선
용서는 피해자가 용서하기 전에 가해자의 진정한 참회가 전제되어야 한다.
참회 없는 용서는 의미가 없다.

용서는 당사자가 아닌 자들이 하라마라 할 사안이 아니다.
내게 잘못을 하거나 죄지은 사람은 용서할 수가 있다.
나만 용서하면 되니까.

그러나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은 사람은 함부로 용서하면 안 된다.
죽은 사람이 용서할 수는 없으니까.
용서는 누가 대신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더구나 홀로코스트와 같은 대량 학살은 어떤 경우에도 용서란 있을 수 없다.
그마저 용서한다는 건 또 다른 참극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건 정의가 아니다.

큰 감동을 받았지만 또 다른 고민을 던져주는 책이다.

그대, 용서 받고 싶은가?
먼저 용서 받을 자격을 갖추어라. (끝)
<덧붙임1> / 저자 '시몬 비젠탈' 소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학살자들에 의해 무려 89명이나 되는 일가친척을 잃고 아내와 단둘이서만 살아남은 시몬 비젠탈은 전쟁이 끝난 후 미국전쟁범죄조사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46년에 30여 명의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유대역사기록센터를 설립해 운영했으며, 그의 집요한 추적 덕분에 무려 1,100여 명이나 되는 나치 범죄자들이 법의 심판을 받았다.
그중에는 이른바 ‘최종 해결(유대인 말살 정책)’의 실무 책임자였다가 패전 직후 남미로 도주했던 아돌프 아이히만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업적으로 인해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오랑예 훈장을,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공화국 훈장을, 미국 의회로부터 황금 메달을,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예루살렘 메달을, 영국 정부로부터 대영제국 훈장(명예2급)을 받았다.
2005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같은 해에 향년 96세로 치열했던 생을 마감했다.
평생을 나치 전범 추적에 바친 그의 모습은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에 의해 소설과 영화 속 주인공으로 형상화되었다.
그의 이름을 기려 설립한 ‘시몬 비젠탈 센터’는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지사를 두고 지금까지도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덧붙임2> 우리의 실상

1. 우리도 피해자였다
일제 강점기를 돌이켜보자.
당시 일본이 저지른 위안부, 강제징병, 징용 등의 범죄에 대해서 철저하게 책임을 묻고 일본정부의 공식 사과를 받아야 한다.
그에 따라 배상과 보상 문제를 해결하고 그 다음에야 용서와 화해가 가능하다.

2. 우리도 가해자였다
우리가 베트남전쟁 당시 파병된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들에게 저지른 잔혹한 살상에 대해 진정으로 사죄했으며 보상하였는가.
우리가 일본에 당당하려면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과 보상을 해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 '미안하게 생각', 노무현 대통령 '마음의 빚', 문재인 대통령의 '불행한 역사에 유감' 표명은 있었지만 우리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배상과 보상 문제를 거론한 적은 없다)
 
3. 용서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1> 일본의 만행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온갖 만행에 대한 일본의 작태를 보라.
일제강점기 덕에 우리가 근대화하여 발전할 수 있었다고 기고만장한다.
그들의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만행을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조작이라고까지 우기지 않는가!

그리고 일제강점기 친일파를 해방정국에서 처단하지 못한 그 폐해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들에 대한 '용서 아닌 용서'로 인해 오늘날에도 국민이 고통 받고 국가 발전을 저해한다.

<2> 5.18 광주학살
학살의 주역 전두환의 노후를 보라.
참회는커녕 변명으로 자기방어를 하고 떳떳하게 삶을 즐기며 살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김대중 대통령이 화합의 차원에서 전두환을 사면한 것은 잘못된 일이다.
지금 전두환의 언행을 보면 반성은커녕 뻔뻔하고 당당하기까지 하다.
용서하면 안 되는 악인도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다.
더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강력한 처벌만이 능사다.

용서는 아무에게나 하는 게 아니다.

"감사합니다"  백산 절~ OTL 
by 백산 | 2019/12/21 14:46 | 교육단상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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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김해영 at 2019/12/27 17:17
저는 구판[해바라기]로 잃었습니다.
당연한 서술이 이 땅을 사는 사람에게 왜 이리 머리를 숙이게 하고 부끄러워야 하는지...

부럽습니다.
한가지 진실을 두고 단죄가 이뤄지고
잘못을 부끄러워 하고
용서 조차 구하지 못하는 이 땅의 이분법이
책을 읽는 내내 비교 당하며 부끄러웠습니다.
아직 심포지움 부분은 읽지 않았습니다.
새로나온 책에 심포지움 부분이 보강 되었습니다.

아~~난징대학살을 주제로 한 영화 세편을 찾아 보았습니다.
하두 잔인한 만행이라 해서 아우비츄를 담은 [쉰들러리스트]를 본 후
보았는데 일제와 중국간의 비극이라 더 아팠습니다.
영화 제목이 [난징난징] [진링의 13소녀][존 라베]입니다.
중국과 미국감독에 의해 연출된 영화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펼쳐진 비극은 위의 사건보다 몇 곱절 더 하다는데
우리의 아픔은 꺼집어 내지도 못하는 실정이 아프고 한심합니다.
치유나 용서 보다 반목이 대립하니
역사에 비춰 볼 때 부끄러운 민족입니다.

집에가 해바라기의 심포지움 부분을 숙독해 보겠습니다.
Commented by 백산 at 2019/12/27 21:27
난징대학살은 정말 끔찍한 천인공노할 학살이었죠.
중일전쟁 당시 일제에 의한 30만 명이 넘는 중국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사건으로
살상자 수로는 600만 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한 홀로코스트에 비할 바 아니지만 잔인하기로는 역대급 학살이 아닐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전쟁 중 발생한 불가피한 민간인 피해’라고 축소, 왜곡하는 또 한 번의 만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우리 한반도와 중국, 동남아, 태평양 군도의 여러 나라에서 지은 죄악에 대해 제대로 사죄하지 않고 있음은 물론
다시 군사 대국, 전쟁 참여가 가능한 제국으로 나아가려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더욱 경계하고 대비해야 할 일입니다.

2부 심포지움, 읽어 보시면 용서에 대한 인식을 확고하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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