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나의 독후기32 시간의 압력
「시간의 압력」을 읽고
<시간의 압력>은 중국 산문작가인 ‘샤리쥔’이 역사 인물을 탐구하고 평가한 책이다. 
학술서라기보다는 인물평전에 가깝다.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시간의 압력을 이겨낸 뒤 현대에까지 삶의 의미를 반추하게 하는 인물들이다. 

어려운 한자말, 고사(古史), 낯선 인물 등이 많이 등장하여 검색하며 읽어야 했기에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집중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저자가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중국의 역사적 인물 아홉 명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해석하고 재조명한 책이다. 
어떤 인물이나 부분에서는 지나치게 주관적이라 할 만큼 쇼킹하게 서술한다. 
등장인물은 시대를 초월하여 굴원, 조조, 도잠, 이백, 사마천, 이사, 이릉, 상앙, 하완순 등 아홉 명의 인사들이다.
위대하거나 비루하거나 역사적인 인물탐구가 삼국지, 초한지 만큼이나 재미있다. 

내가 몰랐던 인물들의 이면, 역사적 사건의 진실, 주인공들이 처한 여러 정치적 상황과 그 대처법, 그리고 그로인한 공과와 그 대가 등을 실감나고 재미있게 읽었다. 
인물 뿐 아니라 중국의 역사 견문을 조금은 더 넓힐 수 있었다.
 
저자는 시인이었던 굴원, 조조, 도잠, 이백에 대해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이 평했다.
“특정한 역사의 시공에서 시인들은 모든 감정을 쏟으며 독특한 ‘연기’를 함으로써 개성과 인격을 남김없이 표현할 수 있었다. 
비첩 심리를 가졌지만 절대 노비는 아니었고, 속임수를 부렸지만 위선적인 군자는 아니었으며, 공명을 기대했지만 줏대 없는 추종자는 아니었다. 
터무니없거나 독백을 중얼거려도, 속임수를 써도 순수한 어린아이였고, 비첩 심리를 지녀도 오히려 더 어린아이다웠다. 
생존환경이 확연히 달랐으나 순수한 어린아이의 마음은 서로 비슷했다.” 

옛 위인들이 국가나 절대 권력자,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강단진 모습을 보고는 다시 한 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편으론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국가를, 지조를 버리고 독재자나 배신자의 삶을 선택한 무리들로 마찬가지로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오로지 권력과 명예를 쫓아 인륜을 버리는 인간들은 있었다.

이 책은 옛 인물들의 삶의 자취를 통해 우리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되묻는 듯하다. 
‘나의 삶의 모습은 어떠한가?’ (끝)  

P.S.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감상은 너무 길어 따로 덧붙인다.
<덧붙임> 등장 인물평 

1) 굴원 (BC 343?~278?)

저자는 “시성(詩聖) 두보나 시선(詩仙) 이백이 있는데 성인과 선인보다 높은 것이 신이다. 
중국의 시신(詩神)은 굴원이다.”고 평가했다.

굴원의 시 <이소(離騷)>는 세계문학사에서 최초의 서정시 가운데 하나로서, 중국 문학의 중요한 원천이라고 하니 시인으로서의 그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굴원(기원전 340~278)은 이름은 평(平)이고 자가 원(原)인데, 초나라 희왕과 경양왕을 충심으로 섬겼다. 
그는 풍채가 출중했고 기도(氣度)가 우아했다. 
그의 뛰어나 재능과 빼어난 관상은 남들의 질투와 미움을 유발하였고 온갖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무너져가는 초나라를 위해 온갖 진언과 노력을 기울였으나 천하통일의 야망을 가진 진나라에 멸망하자 절명시 <회사(懷沙)>를 짓고 나서 멱라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만다. 

“굴원의 노래는 숨도 쉬지 못하고 말도 못할 만큼 끝없이 상심하고 실망하여 통곡함으로써 자기 목숨을 제물로 바쳤다.”

굴원이 죽음을 앞두고 쓴 절명시 <회사(懷沙)>를 소개하고 싶지만 너무 길어 생략한다.

2) 조조 (155~220)

“역사 속의 진짜 조조는 호협(豪俠)과 영웅, 문인, 제왕, 재야인사, 간웅의 기질을 한 몸에 집약한 대단히 복잡한 인물이다.” 

그러나 저자는 조조를 다르게 평가했다.
“정치가이자 군사가의 인격에 시인의 인격으로 보조한 것이 바로 조조다.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납고 용맹스러운 영웅이었던 조조나 깊고 부드러운 정감을 가진 시인 조조는 모두 같은 사람이었다.”
“시 짓는 붓을 내려놓으면 칼을 들고, 칼을 내려놓으면 시 짓는 붓을 들었다.”

당대나 후세 역사가들에게 많이 저평가되었거나 악의적인 비난을 받았지만 저자는 특히 시인으로서의 조조를 긍정적으로 높이 평가한 부분이 이채로웠다.

나는 조조가 정치가, 군사가로서의 탁월한 재능이 있는 줄만 알았다. 
그가 시에도 높은 재능이 있음을 새로 알게 되었다. 
계략에 뛰어나고 잔혹하지만 그의 시를 읽어보면 여느 시인과  다를 바 없이 매우 정감 깊은 시인임을 알 수 있었는데 뜻밖이라 좀 당혹스럽고도 놀랐다. 
치세의 달인, 난세의 영웅호걸이었지만 그도 때론 따뜻한 심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의 시 한 편을 감상해보자.

술잔을 앞에 놓고 풍악 듣나니 (對酒當歌/대주당가)
인생이 얼마나 되랴? (人生幾何/인생기하)
마치 아침이슬처럼 (譬如朝露/비여조로)
가버린 날 너무 많아 괴롭구나! (去日苦多/거일고다)

3) 도잠(도연명) (365~427)

마흔 한 살이 되던 해에 벼슬길에서 하나도 얻은 게 없었던 도잠은 정권의 칼날을 피해 철저하게 전원으로 돌아가 은거했다.
그리고 예순 세 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23년 동안 전원생활을 굳건히 지켰다. 

“자연에 맡긴 채 스스로 만족하는 것”, “평생 지기가 없더라도 슬퍼 여길 필요가 없다”며 내적으로 성찰하는 ‘자신 만의 삶’을 살고자 했다. 
그리하여 기본적으로 안전은 보장되었으나 빈곤은 갈수록 가중되어 그를 괴롭혔다.

두 편의 시 일부분만 살펴보자.

1. 怨詩楚調 示龐主簿遵鄧治中(원한의 시. 楚調.龐 주부와 鄧 치중에게 보여준다) 중에서 발췌

여름날 오래도록 주린 배 끌어안고
추운 밤에는 덮고 잘 이불도 없다.
저녁 되면 새벽 닭 울음소리 그립고
새벽 되면 해 저물기 바란다.

2. 詠貧士(가난한 선비를 노래하다) 중에서 발췌

주전자 기울여도 남은 술 방울도 떨어졌고
주방을 훔쳐봐도 연기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청빈낙도의 삶을 자청했다지만 저리도 가난에 찌들었던가.
가난하여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없음 한탄하는 시를 읽고 나니 천재 시인의 삶이 더욱 애달파 보여 가슴 시리다. 
주로 자연을 노래한 뛰어난 시인이라는 정도만 알았던 도잠의 본 모습을 자세히 알고 나니 삶이 허망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무슨 까닭인가. 

그의 빼어난 시들이 대부분 극심한 가난의 고통을 오롯이 안고 살며 토해낸 그의 삶이었다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무릉도원을 꿈꾸는 그의 시, 도화원시(桃花源詩)는 지긋지긋한 빈한한 현실의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인의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가련한 그를 생각하며 그의 <귀거래혜사>를 다시 읊어본다.

돌아가자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

4) 이백(이태백) (701~762)

내가 아는 이백은 시류를 멀리하여 안빈낙도하며 술을 벗 삼는 빼어난 시인이다. 
그런데 저자의 평가를 읽고 이백의 민낯을 알고 나니 조금은 황망하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웅대했으며 탐욕도 큰 사람이었다. 
(당나라 황제) 현종의 신임을 받기 위해 간신배들이나 하는 노골적으로 권력을 탐하는 모습에서 적이 실망했다. 
아니, 내가 그를 너무 몰랐으니 그를 탓할 일은 아니다. 

현종의 인정과 신임을 받기엔 그의 정치적 그릇은 너무 작았다. 
그의 정치인으로서의 포부는 방대했으나 그의 그릇이 너무 작아 그의 꿈을 펼칠 기회를 잃고 만다. 
그 권력에의 탐욕은 죽기 전까지 멈추지 않았다. 

저자는 이백의 그런 비첩심리를 통렬하게 꾸짖는다. 
물론 이는 저자의 지나친 평가라 할 수도 있지만 그런 면모가 있었다는 점은 여러 정황들로 볼 때 부인하기 어렵다. 
이백의 시를 통해 당시 이백의 마음을 파헤쳤기에 충분히 근거가 있으면 단순 악의에 찬 비난은 아니다. 
그러나 저자도 이백을 꾸짖으면서도 그를 인간으로서 미워할 수 없다고 했다.

저자는 이백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백은 단순하고 솔직담백하여 적극적이고 퇴폐적이며 혼돈적이고 맑은 사람이면서 표일하고 속되며 집착적이고 활달하여 자부심 강하고 흥겨우면서도 공허했다. 
저열하고 옹졸하고, 다원적이고 극단적이면서 분열적이고 상실감에 젖은 사람이었고, 술과 고기가 필요하면서도 노을을 먹고 이슬을 마시는 사람이었다. 
이백은 영웅이자 투사, 몽상가, 투덜이, 심지어 버림받은 아낙이자 원망에 찬 여인이었다.”
한 마디로 딱 꼬집어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다단한 심리의 황당한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이니까, 아는 만큼 더 사랑하게 된 것 같다. 
그게 칭찬이든 비난이든 상관없이 굴원이나 도잠과는 다른 지극히 인간적인 이백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이백은 평생 자신을 높여 생각하는 대붕의식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시 <임로가(臨路歌)>에서
대붕이 날아올라 팔방을 진동했는데 / 大鵬飛兮振八裔(대붕비혜진팔예)
중천에서 꺾였으니 힘이 부쳤구나! / 中天儶兮力不濟(중천혜혜력부제)

조춘어강하송채십환가운몽서(早春於江夏送蔡十還家雲夢序)>에서
밝은 달 향해 웃고 / 朗笑明月(낭소명월) 
이따금 떨어진 꽃잎 위에 잠든다 / 時眠洛花(시면낙화)

이 시에서 어린아이 같은 맑은 심성을 지닌 이백을 읽을 수 있다. 
저자는 이백은 달을 연민하고 달은 그를 연민하는데, 사실상 모두 이백이 이백을 연민하는 것이라 했다. 
자기애가 충만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5) 사마천 (BC145~86)

사마천은 흉노와의 전쟁에서 투항한 ‘이릉’을 두둔하다 사형을 선고받는다. 
사마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살하거나, 처형되거나, 궁형을 받는 것뿐이었다. 
사마천은 역사학자였던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사기(史記)를 완성하기 위해 치욕적인 궁형을 선택한다. 

궁형은 그에게 평생 치욕을 안겨 주었으나 오로지 사기를 완성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버텨냈다. 
“이릉 사건은 사마천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고, 그렇게 운명이 바뀐 사마천은 중국의 역사를 다시 썼다. 
중국의 역사에 사마천의 표정이 더해진 것이다.”

“사나이가 죽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으나, 죽는다면 크게 명성을 날려야 할 따름이다!”
壯士不死卿己 死卽擧大名耳 / <史記> 陳涉世家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기 전에는 군주에게 인정받는 것을 가장 큰 영예로 여겼으나 궁형을 당한 뒤로는 명성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역사적으로 인정받는 인물로 남기를 가장 크게 생각했고 그게 그만의 방식으로 복수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 결과 위대한 역사인물전 <史記>를 남기게 되었다.  

저자는 “<史記>에는 울적한 심사와 고민, 적막, 격정, 침음이 충만해 있어서 사마천의 영혼에서 짜낸 쓴 물이 흥건한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사마천을 “정신의 연옥을 통과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6) 이사 (?~BC 208)

‘순자’의 제자로 있다가 학문적 완성을 이루기도 전에 성급하게 정치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스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러져 가던 조국 초나라를 떠나 당시 제국 통일의 가능성이 가장 커 보였던 진나라에서 재상이 되었다. 

“청컨대 사관에게 진나라의 기록이 아니면 모두 불태우게 하시옵소서”
너무나 유명한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이사’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기 위한 수단으로 제안하여 일어난 일임을 알고는 경악했다. 
나는 온전히 진시황의 악행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진시황을 도와 통일대업을 이루었고 진시황의 신임을 받아 철권을 휘두르며 피의 정치를 한다. 
그러나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릴 것 같은 ‘이사’도 결국 자신과 같은 부류의 ‘조고’의 계략에 빠져 삼족을 멸하는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고 자신은 몸을 두 동강 내는 처참한 ‘요참형’으로 최후를 맞게 된다.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정적 ‘이사’를 죽음으로 몰아낸 ‘조고’도 끝내는 ‘이사’의 길을 따라 요참형과 멸문지화라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영원불멸의 제국이 될 것 같은 진나라도 두 영악하고 악랄한 두 간신배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권모술수로 제거된 정적들의 피로 성공가도를 달렸던 둘의 죽음에 역사소설의 클라이맥스를 읽은 듯 통쾌했다.

7) 이릉 (?~BC 74)

그의 조부 이광은 손자의 안녕을 위해 평생을 흉노와 싸웠고 노구를 이끌고도 한나라에 충성을 다했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반대로 손자 이릉은 흉노와의 전투에서 항복을 하여 한나라를 배신한 역적이 되었다. 
그로인해 그의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었고 자신은 흉노의 땅에서 약 20년을 살다가 숨졌다. 
그 시대는 핏물이 강물처럼 넘쳐흐르는 잔혹한 시대였다. 

자신의 배신으로 가족은 물론 가문마저 멸문지화를 당한 이릉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자신을 두둔하다 치욕적인 궁형을 당한 사마천에게 어떤 심정을 갖게 되었을까 참 궁금하다.

8) 상앙 (?~BC 338)

상앙은 위나라 공실의 공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위앙 또는 공손앙이라고 불렀다. 
그는 위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했고, 진나라에 들어간 뒤에는 변법으로 공을 세워서 ‘상군(商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역사에서는 상앙(商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도 자신을 신임하던 효왕이 죽고 아들 혜왕이 즉위하자 그로 인해 타격을 입은 옛 귀족들이 미친 듯이 반격을 하였다. 
반란 모의로 고발당하자 도망을 쳤고 자신이 만든 악법에 발이 묶이고, 위나라로 도주 했으나 쫓겨났다. 
결국 자신의 봉지에서 병력을 꾸려 최후의 몸부림을 쳤으나 그것이 ‘모반’의 증거가 되 가장 처참한 거열형과 족멸을 당했다.

상앙은 재상에 오른 뒤 고발과 연좌의 기술 등 우민화 정치를 통해 “정신에서 물질까지 모든 것을 통일하고 획일화함으로써 국가와 군주가 철저히 장악하면 백성을 어리석고 유약하게 만들어 통제해 강국을 만들 수 있다”는 일념으로 통치했다. 
상앙은 권력에 대한 꿈이 지나쳐 혼란의 시기에 재상의 자리에 앉아 권력을 마음껏 휘둘렀으나 최후는 자신은 극형에 처해지고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하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다. 

100년 뒤의 ‘이사’와 ‘조고’도 똑같은 운명을 되풀이하였음을 보면 권력의 무상함과 인간의 어리석음에 통탄해하지 않을 수 없다.   

9) 하완순 (1631~1647)

하완순은 송강현 화정(지금의 상하이 쑹장)사람으로 명·청 교체기에 살았으며, 순절할 때는 음력 나이로 열일곱 살이었다. 
그의 목숨은 혜성처럼 짧았으나 그 정신의 무게는 항성에 비하더라도 틀리지 않았다.  
17세의 청년장군 하완순은 대명 왕조를 위해 청나라에 맞서 싸우자 포로가 되어 참수형을 당했다. 

당시 이 장면을 목격한 하완순의 친구 두등춘은 
“하완순은 벗 유서와 손을 맞잡고 당당히 나와서 무릎 꿇기를 거부했다. 
망나니는 우뚝 버티고 선 그들의 목을 시원하게 벨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턱 아래에 칼을 대고 목구멍 쪽으로 그었다. 
두등춘은 보았다. 
하완순은 반짝이는 망나니의 칼을 차분히 바라보며 죽었다”고 증언했다.
저자는 “열예닐곱 살에 그가 도달한 정신의 강도는 동서고금에 필적할 만한 이가 드물 정도였다”고 했다.  

하완순은 지극히 높은 천부적 재능을 타고 났는데 다섯 살 때 이미 신동으로 소문났다고 한다. 
당시 일흔여덟 살의 저명한 학자 진계유가 면접을 마치고 “불가사의로다!”를 연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다섯 살의 하완순이 고금을 설명하며 논하는데, 오래 공부한 학자도 따라갈 수 없다.” 

그러나 명석하고 조숙한 하완순도 그의 꿈을 온전히 펼쳐보기도 전에 부친 하완이를 따라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와 맞서 싸우다 요절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감사합니다"  백산 절~ OTL 
by 백산 | 2021/09/15 19:18 | 교육단상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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